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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장군의 묘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이다.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황룡사터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皇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근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탈해왕릉

탈해왕릉은 경주 시가에서 서남방쪽으로 가면 나오는 표암(瓢岩) 근처에 있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다. 신라 4대 탈해왕(脫解王)은 재위 기간 중 가야와 황산진구(黃山津口)에서 싸웠다. 탈해왕은 석씨계의 최초 왕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능은 원래 성 북쪽 양정구(壤井丘)에 수장(水葬)하였다고 하나 다만 성북(城北)이라고 한 점만 현위치와 근사하다. 원형봉토분으로서 능의 형식자체에는 특이한 점이 없는 일반적인 형식이다. 능 서편에 있는 숭신전은 탈해왕의 제향을 받드는 제전으로 조선 광무 2년(1898)월성 안에 세웠던 것을 최근 이곳에 옮겨 지은 것이다. 높이 7m, 직경 10m이며 주위 면적은 11,493평이다.

대릉원(천마총)

경주시내 평지 고분군(平地 古墳群) 가운데 서남쪽 부분으로 20여기(餘基)의 대소(大小) 고분이 남아 있다. 그중 전 미추왕릉(傳 味鄒王陵)을 중심으로 밀집 분포된 18기(基)의 고분들은 1973년 대릉원(大陵苑)이라 이름 붙여진 고분공원(古墳公園)으로 조성되었다. 지상에 봉우리가 솟아 있는 고분들은 외형상 모두 봉토분(封土墳)으로 되어 있으며 단독의 원형분(圓形墳)과 함께 표형쌍분(瓢形雙墳)도 있다.
첨성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天文臺)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첨성대(瞻星臺)처럼 논란이 많은 문화재도 없다. 그것은 첨성대의 쓰임에 관한 이견 때문인데, 어떤 이는 천문관측대였다고 하고, 나침반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다고도 하며, 또한 천문대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첨성대의 의의는 그 자체가 매우 과학적인 건축물이며 돌 하나하나에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을 터이다. 전체적인 외형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사각형의 2중 기단(基壇)을 쌓고 지름이 일정하지 않은 원주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올렸으며, 꼭대기에눈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돌을 엮어놓았다.

임해전지(안압지)

임해전은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경주국립박물관
 

1910년 경주시민의 요청에 따라 출발한 경주신라회가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로 정식 발족하면서 신라의 문화유적 보존을 위해 경주시 동부동에 있던 옛 객사 건물에 전시관을 개설하여 신라문화재를 일반에게 공개함으로써 박물관의 기능이 시작되었다. 1921년에는 금관총 조사를 계기로 경주시민들은 '금관고'라는 건물을 마련하여 여기에 출토품을 전시 보관하였으며, 해방 후 서울의 총독부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정식 개관되자 경주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편제가 정비되었다. 이 때까지 동부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옛 박물관은 1,200여 평의 터에 몇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아담한 박물관이었다.

분황사
 

분황사는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 춘(春) 정월에 창건되었으며 신라 경도(京都)내 7가람 중의 하나이다. 35대 경덕왕(景德王) 14년(775)에 약사동상(藥師銅像)을 조성하였는데 장인은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분황사는 임진왜란시에 소실되어서 후에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경내에 화쟁국사비귀부(和諍國師碑龜趺), 모전석탑(模塼石塔), 석정(石井), 석조(石槽), 초석, 석등 대석 등이 남아 있으며 절의 남쪽 바깥에는 당간지주가 있다. 현재 보광전(普光殿)이라는 작은 법당이 있으며 안에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